메흐메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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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스만 제국의 19대 술탄이자 13대 파디샤.
2. 생애[편집]
2.1. 즉위 전[편집]
메흐메트 4세 재위 초반 시절 모습.
1642년 1월 2일에 이브라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예니체리한테 폐위되고 나서 살해되자 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2.2. 치세[편집]
1597년 착공되어 1665년에 완공된 예니 모스크 (발리데 술탄 모스크)
2.2.1. 수렴청정[편집]
메흐메트 4세의 치세는 할머니 쾨셈 술탄의 수렴청정으로 시작됐다. 선황 이브라힘을 직접 폐위시켰던 쾨셈 술탄은 태황태후에 해당되는 뷔윅 발리데 술탄(Büyük valide sultan)의 자격으로 국정에 개입했다.[2] 이는 당시 태후인 발리데 술탄으로서의 권위를 얻지 못하고 퀴췩 발리데(küçük valide)로 불렸던 메흐메트 4세의 모후 투르한 술탄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투르한 술탄은 환관들을 포섭해 궁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그 중 쉴레이만 아아(Lala Süleyman Ağa)라는 환관은 대표적인 친 투르한 술탄 환관이었다. 쾨셈 술탄과 투르한 술탄간의 고부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됐다. 일설에 의하면 쾨셈 술탄은 손자를 살해하기 위해 메흐메트 4세에게 독이 든 로쿰을 먹이려다가 궁인 멜레키 하툰에게 제지당해 무위에 그쳤다고 한다.
1651년, 쾨셈 술탄은 이브라힘의 후궁 살리하 딜라슙 술탄이 순종적이고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판단, 살리하 딜라슙 술탄의 아들인 쉴레이만 황자[3] 를 황위에 올리고 메흐메트 4세를 폐위시키고자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계획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투르한 술탄에게 발각됐고 손자를 폐위시키려던 쾨셈 술탄은 쉴레이만 아아가 이끄는 무장세력에게 살해당한다.
투르한 술탄은 쾨셈 술탄의 수렴청정을 이어받아 의욕적으로 내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반란 모의 등 내외정의 어려움이 이어졌고 결국 투르한 술탄은 아들을 잘 보필할 신료로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를 낙점해 그녀의 권력과 권한들을 넘겨주고 자신은 자선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이로서 휘렘 술탄의 황후 책봉으로 시작된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는 막을 내리고 쾨프륄뤼 시대가 개막했다.
2.2.2. 크레타 정복[편집]
자세한 내용은 크레타 공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차 베네치아-튀르크 전쟁 (1645 ~ 1669년)
2.2.3. 대합스부르크 전선[편집]
4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663 ~ 1664년)
전황은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에르데이 공국에 역공을 가하기도 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오스만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했다. 에르셰쿠이바르를 얻고 기고만장해진 오스만은 군제 개혁의 기회를 놓쳤다.
2.2.4. 포돌리아[4] 점령[편집]
3차 오스만-폴란드 전쟁
2.2.5.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편집]
드네프르강을 국경으로 정함.
2.2.6. 대튀르크 전쟁[편집]
상헝가리[5] 에서 퇴쾨이 임레가 주도한 반 합스부르크 봉기에 호응하여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가로막혀 대패했다. 결국 메흐메트 4세는 이 실패로 말미암아 폐위당했고 이복동생 쉴레이만이 쉴레이만 2세로 즉위했다.
2.3. 퇴위와 사망[편집]
1687년에 퇴위되었으며, 톱카프 궁전에서 갇혔고 1693년에 향년 51세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제위에 오르기 전 부황 이브라힘이 다른 후궁 소생 황자를 귀여워하는 걸 본 모후 투르한 술탄이 "폐하의 아들은 메흐메트고 폐하의 아내는 저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가 격노한 이브라힘이 어린 메흐메트를 연못에 던져버리는 바람에 죽거나 크게 다칠 뻔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편집]
-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하얀 성은 메흐메트 4세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메흐메트 4세가 등장인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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